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바로사 작전 (문단 편집) == 작전 준비 ==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 ||독일||소련||비율|| ||사단수 ||166||190||1:1.1|| ||총병력 ||4,306,800||3,289,851||1.3:1|| ||화포 ||42,601||59,787||1:1.4|| ||전차 및 자주포 ||4,171||15,687||1:3.8|| ||전투기 ||4,389||11,537||1:2.6||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사단의 수는 소련이 더 많은데, 독일 측의 병력수가 더 많은 이유는 편제의 차이 때문이다. 개전 당시 독일 보병사단의 정원은 17,000명[* 1941년에는 9보 4포의 편제로 13개 대대를 보유했으나 청색 작전 이후로는 6보 3포로 줄어들어 2/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기갑사단의 정원은 12,000명 정도였지만, 소련 소총사단의 정원은 11,000명[* 이후 점차 줄어들어서 쿠르스크 전투 시점에서는 9,000명이 되었다.]이었다.[* 다만, 소련군의 편제가 독일군보다 한 단계 낮았다는 것은 좀 애매한데 개전 이후 새로 생기는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의 경우 타국 기갑사단 규모이기 때문에 명백히 한 단계 낮은 제대가 맞다. 그러나 보병의 경우 그 정도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1943년이 되면 소련군 소총 사단은 9,000명이 정원이지만 독일 보병사단 역시 12,000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대신 화력의 차이가 매우 극심해서 독일 사단이 소련 군단급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포가 훨씬 많은데 왜 화력의 차이가 발생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교리의 차이, 중장비 부족, 숙련도 부족, 정찰의 한계 등등으로 화력의 효율이 독일군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2년간의 실전 경험[*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등 숱한 실전을 겪은 독일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엄청난 강군이었다.]으로 장비 수는 부족했지만 그 운용법은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KV-1]]과 [[T-34-76|T-34]]는 초기에 독일군의 [[3호 전차]]를 대학살하면서 독일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숙청을 당한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기습당해서 이륙도 못해본 채로 상당수의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채워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